플랑/도르 스칼렛 4화: 의심과 공포와 부서진 마음

동방홍마향

난이도 Tutorial

동행자 플랑도르 스칼렛

4. 의심과 공포와 부서진 마음

 

 

 

 

 

실례합니다.”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관에서 가장 큰 문 안 레밀리아와 대화한 방으로 도르는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하얀 옥좌는 비어있고 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천천히 문을 닫고 안을 걷는다. 옥좌를 향해 펼쳐진 붉은 융단 위에서 좌우를 둘러본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변함없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한산한 방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은 아까보다 크게 느껴졌다. 옥좌에 앉자 도르는 그 옆에 테이블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 수수한 둥근 테이블. 높이는 옥좌의 팔 높이 정도지만 면적은 작다. 그 위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무슨 책일까?”

손에 그것을 들고 연다. 매우 묵직한 감각이 손에 전해졌다. 겉보기만큼 상당한 무게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표지를 넘겨 내부를 확인한다. 순식간에 그것이 무언인지 플랑과 도르는 깨달았다.

아니, 이런 건 맘대로 보면 안되잖아

부탁해, 도르. 잘 보이게 읽어줘.’

안에 쓰여 있는 것은 레밀리아의 일기. 분량을 생각하면 꽤나 오래 쓰인 것이다. 처음에는 이 관-홍마관이라고 하는 것 같다-에 대한 사항이나 사쿠야 등에 대해 써있었지만 최근의 일기를 보면 전부 플랑에 대해 쓰여 있었다.

플랑이 지하실에서 나온 것과 광기가 사라진 것, 그녀가 플랑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 전해졌다.

언니

같은 시야로 일기를 보고 있던 플랑이 작게 소리냈다. 그녀도 레밀리아의 상냥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일기를 계속 읽고 있자 문소리가 크게 들렸다. 돌아보면 레밀리아가 문 앞에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플랑보았구나.”

어두운 얼굴을 하며 레밀리아는 도르에게 다가온다.

나는 이런 것에 서툴러서 너를 가두기만 했고 광기가 사라졌다고 해도 축하 한 마디 제대로 못했어. 너도 힘들었을 텐데혹시 나를 원망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레밀리아는 도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 표정을 도르는 견딜 수 없었다.

레밀리아, 잘 들어.”

플랑?”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고, 레밀리아를 똑바로 응시한다.

나는 플랑이 아냐.”

이렇게 여동생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도르에겐 불가능했다. 그것이 도르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 무슨 소리야, 플랑?”

달라 레밀리아. 나는 도르야. 플랑의 모습을 하고 있짐나 나는 플랑이 아니야. 전혀 달라.”

레밀리아는 눈을 부릅떴지만 시선은 여전히 도르를 향해있었다.

그럼 예전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은

아무래도 레밀리아는 감각적으로 도르와 플랑의 차이를 느끼고 있던 것 같다.

내가 플랑이 아니였으니까. 그런데 레미

플랑은 어떻게 했어?”

도르의 말을 가로막고 레밀리아는 말했다. 얼굴을 살펴보면 레밀리아는 이 쪽을 꿰뚫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플랑은 내 안에

증명할 방법은?”

이제와서 도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증명할 수단이 도르에게는 없다.

당황하는 도르를 붙잡고 레밀리아는 한 번 숨을 들이쉬고 손에 소환한 붉은 창을 그녀의 목에 들이댔다.

증명할 수 없다고? 거짓말인 건 아니고? 그래서? 너는 어쩔거지? 플랑의 몸을 손에 넣어 나를 협박이라도 하려고?”

레밀리아그게 무슨

도르는 계속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중압. 레밀리아가 내뿜는 거대한 살기는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샹들리에가 흔들리고 창문은 금가고 공기가 날뛴다.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

역겨운 놈. 무슨 요괴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플랑을 되돌려 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죽여줄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태어난 것을 후회할 만큼.”

공기의 중압을 견디지 못하고 전혀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도르를 레밀리아는 비웃는다.

이정도의 살기와 요력도 견디지 못하면서 플랑의 몸을 뺐었다는거야? 훨씬 얄미워지네.”

시시하다는 듯이 레밀리아는 살기를 거두었다. 몸 전체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도르는 필사적으로 숨을 쉰다.

머리는 이미 새하얗고 시야는 계속해서 깜빡이고 있었다. 플랑이 뭔가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약해져 있었다.

빨리 되돌려놔.”

, 나도 그러고 싶지만못해

도르의 말에 다시 살기를 내뿜는다. 다시 중압감이 몸을 덮친다.

적당히 해.”

레밀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씩 창에 힘이 담겨간다. 창 끝은 목을 찌르고 미지근한 피의 감촉이 흘렀다. 이대로는 정말 생명이 위험하다.

,드시돌려보낼테니까

어떻게든 목청을 쥐어짜 말한다. 그러나 레밀리아는 전혀 힘을 풀지 않는다.

완전히는 아니여도 믿을 수 없어. 무엇보다 너따위에게 플랑의 몸을 맡길 이유가 없어.”

반드시되돌릴 테니까

순식간에 창을 버리고 팔을 뻗어 레밀리아는 도르의 멱살을 잡는다. 그 작은 몸의 어디서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의 강한 완력이다.

무릎을 꿇은 도르의 눈을 지근 거리에서 바라보고 그 눈동자에 공포를 심었다.

재밌네. 어차피 플랑이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 못해. 멩세해. 무슨 일이 있어도 플랑을 되돌린다고. 되돌릴 수 없으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고.”

레밀리아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빛난다. 광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할 때보다 더욱 빛나고, 눈을 뗄 수 없다.

도르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이 흡혈귀의 절대 서약의 의식이라는 것을.

, 알겠어

후후

도르를 거칠게 놓으며 레밀리아는 웃는다. 그것은 일그러진 미소. 레밀리아는 확신했다.

플랑이 사라졌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사랑하는 여동생의 모습을 사칭한 요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도 다시 되돌린다는 실없는 말을 반복하는 광대를 레밀리아는 철저히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그 요괴는 모른다.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뱀파이어가 어떤 존재인지.

자기가 한 일을 뉘우치며 깨닫는 것이 좋다. 되돌린다고 말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플랑의 몸을 빼앗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그런 능력을 쓴 자신의 어리석음을.

레밀리아는 미소를 거두고 차가운 시선을 도르에게 향한다. 그 눈에는 분노, 원망 등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나가, 도르. 넌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어.”

손가락으로 문을 가르키고 있다. 요력에 반응해 문은 큰 소리를 내며 열린다.

얼굴을 파랗게 하며 도르는 그곳을 도망치듯 떠났다.

그것을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끝났다는 듯이 레밀리아는 손가락으로 문을 닫는다. 그대로 요력을 해방하여 자신의 4할 정도의 힘을 모아 하늘을 향해 날린다.

방출된 요력은 홍마관의 천장을 뚫고 상공 높이까지 올라가 그대로 폭산하는 붉은 안개를 만들어 냈다. 태양빛을 싹 지워버리는 그 힘을 환상향의 구석구석까지 뻗친다.

후에 홍무이변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예상보다 조금 일찍 시작하게 된다.

 

도르! 도르!’

플랑의 비통한 목소리에 도르는 깜짝 놀란다. 깨달으면 자신은 홍마관의 복도를 홀로 걷고 있던 것 같다. 레밀리아가 격분하고 나서의 기억은 전혀 없고, 깨달으면 밖은 마치 지옥처럼 새빨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괜찮아 도르?! 저런 거 신경쓰지 마!’

으응

플랑의 말에 겨우 대답하면서도 아까의 공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원래 도르는 플랑을 되돌릴 생각이었고, 그래서 최대한 노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르의 안에는 강박관념이 싹트고 있었다. 플랑을 되돌리지 않으면, 플랑을 되돌려야 한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다. 그리고 플랑은 그것을 깨달을 수 없었다.

어어이건 대체 무슨 일이야?”

몰라. 레밀리아가 뭔가 한건가.’

플랑은 그대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도르는 플랑의 레밀리아의 호칭이 달라진 것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르가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것을 플랑도 알아차렸다.

일단사쿠야 씨를 찾아 전달해야

그치만 도르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될 건 알고 있었고, 그래도 역시 사쿠야 씨나 파츄리에게도 말해두지 않으면.”

힘없이 웃으며 도르는 관을 나선다. 그 마음엔 금이 가 있었다.

 

잠시 관을 돌아다녀 겨우 사쿠야를 찾아냈다. 사쿠야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고, 그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없다.

, , 사쿠야 씨.”

도르의 목소리에 사쿠야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여동생 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 달라. 나는 플랑이 아냐.”

조금 전의 공포가 되살아나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쿠야는 단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 나는 플랑의 몸을 빌렸을 뿐 플랑이 아냐.”

사쿠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르는 필사적으로 지금의 자신과 플랑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말은 한마디 뿐이었다.

그래서 아가씨는 뭐라고 했나요?”

반드시 플랑의 몸을 되돌리라고. 그 다음엔 죽일 거라고

자신의 몸이 떨리는 것을 도르는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플랑이 필사적으로 도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최대한 빨리 몸을 돌려주세요. 그 다음엔 아가씨의 명령대로 제가 당신을 처리할테니.”

?”

도르는 처음에 사쿠야가 말한 의미를 몰랐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이 도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개를 들고 사쿠야와 눈을 맞춘다.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든다.

그 눈에는 아무것도 비춰보이지 않았다. 도르를 보고 있지만 도르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 이 사람은 레밀리아 이외에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동시에 지금까지 마음을 뒤덮었던 슬픔이 사라져가는 듯 했다.

자신이 울고 무서워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사쿠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르는 발길을 돌렸다. 목표는 도서관. 등에 사쿠야의 기운을 느끼며 걷기 시작한다. 불러세우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머릿속에선 플랑이 여러 가지 외치고 있지만 그 목소리도 도르에겐 닿지 않았다.